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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4일

이 글은 2025년 예일 대학교 그래픽 디자인 석사 청구를 위해 제출한 『A Reflective Object』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점이 나의 정체성의 일부임을 처음 알게 된 건 독일에서 교환학생을 할 때였다. 새로운 환경에서는 나와 내 주위를 둘러싼 것들 사이의 틈새와 어긋남이 눈에 밟히기 시작한다. 단지 새로운 장소 뿐 아니라, 나 자신 또한 낯설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관찰자가 되어 거울 속을 들여다본다.

나에게 있어 가장 큰 낯설음은 언어로부터 기인했다. 스스로의 이름을 미국식으로 발음하는 것은 기묘하다. 가끔씩은 누군가가 문장 속에 섞은 ‘Do you wanna’가 꼭 ‘지원’처럼 들리기도 한다.

미국에서 한국어로 된 글을 작업에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종종 번역을 해야 했다. 번역은 철저하게 ‘의도적인’ 행위이다. 말이나 생각을 할 때 결과값의 언어를 직접 끄집어내는 것과 달리, 번역은 원어로부터 시작한다. 번역은 곧 분리되어 있는 입력값과 결과값을 연결시키는 일이다. 원어가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를 찬찬히 살피고, 그것과 가장 가까운 쌍둥이를 번역된 언어에서 찾기 위해 정성 들여 시간을 할애한다. 원어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 때 번역된 언어는 원어의 대체재가 아니라 원어가 갖지 못하는 고유함을 지닌 거울 언어가 된다. 두 언어는 낯선 사이지만, 서로를 들여다 보고 있다. 이제 나는 낯설어 보였던 거울 속의 내 자신을 보며 생각한다. 어색해 보이지만, 이것 또한 나다.

거울은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지 않지만, 마주하고 있는 모든 걸 드러낸다는 점에서 투명하다고 할 수 있다. 직면함으로써 작동되는 엑스레이 오브제인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이 심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거울을 마주보는 일은 어려울 수 있지만, 나는 내 자신에게 솔직하고 싶다. 또 그것을 즐거이 해내고 싶다. 좋은 작업에는 언제나 어떠한 종류의 진실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거울 보기를 멈출 수 없다. 멀어질수록 점점 커다래지는, 다른 언어로 말을 하는 나를 보여주는, 또 나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거울.


무결하지 않은 이를 위한 애도
2025년 4월 21일

이 글에는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즌 2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Cordyceps라는 동충하초 곰팡이균에 의해 인간 문명이 파괴되고 있는 이 작품에서 ‘면역’이라는 특성의 상징성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엘리는 모종의 이유로 곰팡이균에 대한 면역을 보유하고 있고, 조엘은 딸을 잃은 이후로는 눈 앞에 펼쳐지는 수많은 죽음과 공포에 대한 면역을 형성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끼게 되는 일, 또 그 사람을 잃는 일에 대한 면역은 결코 기를 수 없었다.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냉담한 두 인물의 마음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순간, 데이빗을 살해한 뒤 울먹이며 조엘을 끌어안는 엘리와 그런 엘리를 딸의 별명(baby girl)으로 부르며 다독이는 조엘을 본 순간, 시청자의 마음의 문 역시 허물어지게 된다. 도덕적으로 도마 위에 오를 법한 극 중 인물들의 행동이 완전한 단죄의 대상보다는 비극에 가깝게 느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조엘은 생존이 위협받는 아포칼립스 세계관의 윤리적 딜레마를 대변하는 양날의 검과도 같다. 사랑과 상실에 대한 비면역은 그 검을 더욱 더 날카롭게 벼린다.

시즌 1 마지막 화의 병원 학살 장면에서, 조엘 역의 페드로 파스칼이 마치 오토 파일럿 모드에 들어간 것처럼 연기한 점이 매우 섬세하고 현실적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방어 기제로 읽힌다. 조엘은 매우 잔인해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살인을 일말의 꺼림칙함 없이 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그의 세계에서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충돌하는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할 수 없는 조엘은 자신의 폭력 행위와 결과를 분리한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행동에는 결과가, 결과에는 책임이 따르게 된다. 최대한 빠르고 자비로운 죽음이었든 아니든, 조엘에게 목숨을 잃은 이들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조엘과 같은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비극이 낳은 또 다른 비극이다. 시청자들은 조엘과 여정을 함께해왔지만 그의 상실에 공감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잃은 애비가 조엘에게 복수하고 싶어하는 마음 또한 이해할 수 있다. 조엘에게는 인류의 존망이 아닌 엘리의 생사 여부가 세계의 전부였던 것처럼, 애비에게 아버지가 갖는 의미가 그러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여기까지 오면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그래서 조엘은 과연 죽어 마땅한 존재인가? 나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또한 나는 <더 라스트 오브 어스>가 조엘을 죽어 마땅한 인물로 그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티비시리즈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충격적이었고, 큰 사랑을 받은 캐릭터의 끔찍한 죽음을 지켜보는 것은 마음이 아팠으나,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조엘의 죽음이 불의(不義)였음을 분명히 말한다. 극 중 애비의 동료조차 그 방식의 잔인함에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조엘의 인생에 있어 가장 거대했던 재난은 언제 감염될지 모르는 곰팡이균도, 사라와 테스의 죽음도 아닐지 모른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스스로가 자신을 죽어 마땅하다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아포칼립스이다. 사라의 죽음 이후 조엘은 살고 싶지 않았고, 엘리를 만난 후로는 엘리를 위해서 살아간다. 말 그대로 그의 삶의 전부가 사라와 엘리였다. 사라를 잃고, 병원 사건으로 인해 엘리 또한 감정적으로 잃은 것이나 다름 없게 된 조엘은 그렇기에 한 순간도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다. ‘닥치고 빨리 끝내달라‘는(Shut the f—k up and do it already) 조엘의 마지막 대사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방짐처럼 포장되었으나 실상은 삶을 유기하는 듯한 태도가 느껴졌다. 그는 유리창 너머로 마을이 불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숨이 끊기기 전 엘리가 등장하자, 조엘은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저항을, 엘리를 지키기 위해 살고 싶어하는 절박한 마음을 보여준다. 이 고통스러운 죽음을 마주해야 했던 엘리에게 조엘의 마지막이 그나마 단념이 아닌 신념으로 남았다는 것에 비참한 위안을 삼아본다.


Y에게
2022년 2월 23일

우연히 신형철이 2016년도에 썼던 사설을 읽어보게 됐어.

W.H.오든의 <장례식 블루스>를 통해 사랑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이었는데, 이 시는 1연에서는 고요함을 요구하고, 2연에서는 동참을 요구하고, 3, 4연에서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야.


장례식 블루스  - W.H.오든

모든 시계를 멈춰라, 전화를 끊어라,
기름진 뼈다귀를 물려 개가 못 짖게 하라,
피아노들을 침묵하게 하고 천을 두른 북을 쳐
관이 들어오게 하라, 조문객들을 들여보내라.

비행기를 하늘에 띄워 신음하며 돌게 하고,
그가 죽었다는 메시지를 하늘에 휘갈기게 하라,
거리의 비둘기들 하얀 목에 검은 상장(喪章)을 두르고,
교통경찰에게는 검은 면장갑을 끼게 하라.

그는 나의 동쪽이고 서쪽이며 남쪽이고 북쪽이었다,
나의 평일의 생활이자 일요일의 휴식이었고,
나의 정오, 나의 자정, 나의 대화, 나의 노래였다,
우리 사랑이 영원할 줄 알았으나, 내가 틀렸다.

별들은 이제 필요 없다, 모두 다 꺼버려라,
달을 싸버리고 해를 철거해라,
바다를 쏟아버리고 숲을 쓸어버려라,
이제는 그 무엇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니.


신형철은 3, 4연의 강력한 울림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고심하다가 히라노 게이이치로의 책 <나란 무엇인가>를 떠올렸대. 이 일본 소설가는 진정한 나를 찾느라 번민하는 이들, 혹은 너무 많은 나 앞에서 자신을 위선자라 자학하는 이들에게, 그냥 우리에게는 여러개의 나가 있음을 인정하는 편이 낫다고 조언한대. ‘나’란 나눌 수 없는 개인이 아니라 여러 개의 나, 즉 ‘분인’들로 존재한다고. 우리가 여러 사람을 언제나 똑같은 ‘나’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의 앞에서만 작동하는 나의 분인이 생기는 것이고, ‘나’란 바로 그런 분인들의 집합이라고. 그래서 신형철은 이렇게 적었어.


이런 관점으로 ‘사랑’과 ‘죽음’이라는 사건을 바라볼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마음에 든다. 그런 나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당신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지도 이해할 수 있다. 그를 잃는다는 것은 그를 통해 생성된 나의 분인까지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그 사람과만 가능했던 관계도 끝난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다시는 그때의 나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사랑과 죽음의 분인론’과 함께 이제 3~4연의 절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3연이 하나하나 확인하듯 말하고 있는 것은 그가 나의 모든 시공간적 좌표, 즉 내 삶에 안정성과 방향성을 부여하는 틀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내 속에는 많은 내가 있다. 고통과 환멸만을 안기는 다른 관계들 속의 나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나를 버텨주기 때문이었다. 단 하나의 분인이 여러 다른 분인으로도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죽을 때 나 중에 가장 중요한 나도 죽는다. 너의 장례식은 언제나 나의 장례식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후반부는 자기 자신을 장사지내는 사람의 말이다.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권한이 당연하게도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존재의 아픔과 상실을 겪게 되겠지. 그 고통의 정도가 너무 커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무섭게 느껴지던 때도 있었어. 확장되었던 나의 일부를 잃는 건 매번 숨이 턱턱 막히는 일이니까. 그렇지만 까뮈가 인간의 존재에는 이유가 없고 결국은 우리 모두가 죽음을 향하는 것일지라도 끊임없이 저항해야만 한다고 말했듯이, 상실이 두려워서 시작하지 않기에는 사랑의 중력이 너무 강력하지 않은가 생각했어. 삶이 죽음에의 저항이라면, 사랑은 고통에의 저항이 아닐까.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성을 품고도 기꺼이 용기를 내서 나를 누군가에게로 확장시키는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편지가 너무 진지했나? 나는 너와 함께 있을 때의 내가 마음에 들어. 그런 나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너를 나는 사랑해. 그러니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오래도록 내 곁에 있어줘. 내가 바라는 건 이것 하나 뿐이야.


조조 래빗
2022년 1월 12일

이 영화는 전쟁의 정치와 조조 개인의 성장이라는 두가지 테마를 유려하게 함께 녹여냈다. (그리고 사실 모든 개인적인 것은 결국에는 정치적이지 않은가.) 나치가 얼마나 허황된 사상에 빠져 있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히틀러를 조조의 ‘상상친구’로 보여준 것이 영리했다. 아이들이 자라며 더 이상 상상친구를 보지 않게 되듯이 조조 또한 머릿속 히틀러를 떨쳐내며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적 가치를 깨닫고 성숙해진다.

조조는 10살이고, 토끼 한 마리 죽일 수 없는 사람이다. 이것 때문에 놀림을 받게 된 그는 ‘조조 래빗’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그는 쇠붙이를 들고 전장에 나가 유대인들을 몰아내는 강한 나치가 되기를 소망하는 듯 보이지만, 막상 마주한 전장은 끔찍해 보였고 집에 숨어든 유대인은 괴물이라기엔 너무나 인간 같았다. 조조는 그렇게 자신이 생각해온 것과는 다른 현실을 점차 인지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쇠붙이도, 다이너마이트도, 근육도 아닌 사랑임을 알게 되는 과정에 든다.

조조는 유대인들은 흉측한 것을 좋아하지? 라고 엘사에게 조롱하듯 물었다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에 있는 화상 흉터를 생각한다. 상상친구 히틀러에게 자신이 흉측하냐고 묻자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끔찍한 존재여야만 하는 엘사는 조조의 흉터를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조조가 서로 다른 점이 있는 인간들 사이에도 존중과 애정이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엘사를 끝까지 숨겨준 조조는 전쟁이 끝난 뒤 그녀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와 춤을 추고, 배경 음악으로 데이빗 보위의 ‘Heroes’가 울려퍼진다. 영화 속에서 작고 연약한 소동물처럼 취급되었던 ‘조조래빗’이 결국은 용감하게 엘사를 지켜냈고, 내내 좁은 공간에 갇혀서 지내야 했던 엘사가 조조를 편협하고 허황된 토끼굴 속 세상으로부터 꺼내주었다. 여기서 이 두 사람은 가히 영웅이라 불릴만 하다.


바지 주머니
2022년 1월 2일

정말 별 거 아닌데, 요전에 노량진에 수제비를 먹으러 갔을 때 네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 있는 게 좋았다. 그게 왜 그렇게 좋았을까.


C에게
2020년 1월 11일

우리는 열두 살 때 친구가 되었다. 사는 아파트가 같았고, '지원'이라는 이름을 공유했다. 체격도 외모도 닮아있어 가끔 사람들은 우리를 자매로 보기도 했다. 우리는 둘 다 예술을 사랑했다. 너는 첼로를 켰고, 나는 그림을 그렸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지만 너와 내가 계속해서 친구일 것임은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여전히 나한테는 네가 가장 친한 친구라고 믿고 싶다. 비록 네가 병원 침대에 누워 내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없어도.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너는 '온 몸이 너무 아파'라고 말했다. 그게 마지막으로 들은 너의 목소리였다. 그런 마지막은 말도 안된다. 너와 나는 이런 앞날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너는 겨우 스물 셋이고, 두 달 있으면 스물 네 살이 된다. 무엇에 화를 내야할지 모르겠지만 억울하고 화가 난다. 너는 겨우 스물 셋인데.


전화
2019년 8월 19일

지난 수요일 전화로 엉엉 울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니 왜 더 쏟아져 나오던지. 창피하게도 속마음을 낱낱이 내뱉었다. 내가 왜 당신에게 전화를 했는지 모르겠다. 위로가 필요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전화를 할 수도 있었다. 당신은 심지어 스스로를 공감능력 없는 사람이라 칭했고, 농담을 제쳐두고 겉에서 봤을 때 당신은 상당히 건조하고 차가운 편이긴 하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따뜻한 말을 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으로부터 지루하고 평범한 위로를 받고 싶어서. 아마도 그게 필요했던 것 같다.

한바탕 울고 나니 속이 좀 시원해졌다.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

오늘은 2025년 4월 14일, 나는 뉴헤이븐에서 5년 전에 적어둔 이 글을 읽고 있다. 아직도 당신이 그 날 전화를 받고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었던 게 고맙다. 내가 정확히 무어라 말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신은 기억이 날까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당신이 자기 전 위스키를 온더락으로 한 잔씩 마시는 취미를 들였다는 말만 생각난다. 혹시라도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다시 한 번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구토
2017년 언젠가

처음 구토감을 느낀 것은 18살이 되던 해 겨울이었다. 로캉탱처럼 처음엔 나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겨울이니까. 봄이 되면 괜찮아지겠지, 그렇게 넘기었다. 그러나 4월이 되어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떠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에 가장 기분이 좋았다. 그 외의 시간에는 불안감에 손이 덜덜 떨렸다. 나의 구토감에 이유가 없다는 게 당시에는 막다른 길과 같았고, 무엇도 그 절망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루는 샤워를 하며 비틀즈의 렛잇비를 흥얼거렸다. 내 삶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성모께서 와주시진 않았지만 따뜻한 물줄기와 함께 잠시 마음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샤워 부스를 나서는 순간부터 구토감은 물 밀듯 찾아왔다. 신을 믿지 못하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그때 사르트르와 실존주의 철학을 알게 되었다.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는 그의 말은 나에게 큰 위안이었다. ‘무의미함’이 당연한 것임을 말해준 첫 번째 문장. 존재에 이유가 없다는 것은 막다른 길이 아니라, 모든 것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 문장이었다.

‘구토는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고, 그렇게 쉽게 내게서 떠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이상 그것에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어떤 병도 아니고 지나가는 발작도 아니다. 나 자신인 것이다.’

18살의 나는 구토가 영영 사라지기를 무언가에 자꾸만 기도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곧 나의 존재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일부임을 안다. 사르트르는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나약하고 고통받는 인간이면서 같은 처지의 수많은 이를 위로할 수 있다는 게 끔찍하게 좋았다. 다른 차원의 대단한 존재라서가 아니라, 같은 걸 겪고 느끼는 무력한 인간이기 때문에 건넬 수 있는 덤덤한 위로라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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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raft는 김지원의 어중간하게 사적인 글을 위한 공간입니다. 글을 쓰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에는 디자인 일을 하고 영화관과 TV 앞에 앉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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